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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7. 17世 〉18. <부정공>학생공휘급묘표(學生公諱깈墓表)
1. 문헌 목록 〉17. 17世 〉20. <부정공>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행숙천도호부사공휘진부가장(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行肅川都護府使公諱鎭溥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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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부정공>승지공휘석부행장(承旨公諱碩溥行狀)
承旨公諱碩溥行狀 公諱碩溥姓趙氏字果汝號湖軒系出玉川高麗門下侍中諱璋乃其鼻祖也以簪纓繼至諱元吉號農隱恭讓朝以一等勳封三重大匡玉川君諡忠獻是生諱瑜麗季爲典農副正與圃牧兩隱相契重我朝累徵爲漢城府尹抗節不就入杜門洞自號虔谷至孫諱智崗忠武衛 贈吏曹參判與伯仲解紱並歸築亭于謙川扁以相好以友愛稱於世有子諱琛大司成 贈吏曹參判是生諱忠貞世子侍講院說書以經學著世寔公之八世祖也曾祖諱荊璧壽階通政大夫祖諱泰謙 贈左承旨考諱一臣隱德不仕妣全州李氏弼昌女孝寧大君補后有三男長曰聖溥次曰賢溥公其季也以 正廟丁巳十一月五日生生有異凡自六七歲能知定省之道夙夜無闕常坐不奧曰長者所處也每遇時物必先親而後入口也親若有病廢食啜泣須叟不離側或出他未還夜深不寐俟之洞外必扶持而人及其就外傳也日讀數百行瑞而揜卷輒誦文理夙就尤服膺於切己用功之處也自塾距家十許里每間日歸省無敢曠闕同學有乏粮告歸者分食而留之行路有凍餒幾死者解衣而救之鄕黨莫不以遠器稱之及長受經於伯父參判公服習詩禮益自感奮反復質講日益將就參判公稱之曰後日紹我家者必此兒也常以勤謹二字警勉之逮甲戌母夫人患候危劇侍湯嘗糞齋沐禱天竟以命終呼母接顔哀號徹天願言同歸則自母胷間忽有爆竹聲翻然回甦以壽撫背曰吾死命也汝死非孝也因復殞絶人皆謂至誠所感死母甦戒也其擗踊谷泣淚盡繼血絶食五六日旣葬啜粥居廬哀踰成疾猶不脫絰帶不進桂薑之屬朝夕哭墓一日哭仆於墓下隣里老婆知而往徃救之自喪母以後事父尤勤採山釣水親供甘旨至癸未丁父憂哀毀一如前喪其葬禮之日有山隻甚頑强輝刃而欲 之見公惻嘆之氣溢於辭表乃投刃于地大悟曰孝子之葬禮吾不忍加害仍結同楸之誼有庶母之薄待事多瞹眛累經險苦而不形于色曲順其志父知而欲出之力諫止之後乃感化也其祭也必齊戒思其所嗜必得雉腊而親自檢飭於飪之節務精潔每遇肉食紬衣則必却之曰吾自少貧窶不能以是奉吾親者也因爲出涕表碣修墓置田守護以竭平生之力自喪伯父懼先智之未述慟家業之未紹益專意於學以庸學心經近思錄及我東諸儒言行雜錄日夕輸誦爲平生省察之方切不喜時人之褒獎 純祖戊子朴京試時邪學滋蔓於畿旬乃決意廢擧慨然憤發而歸鄕以興起儒風爲志與南中士友結社會講行飮射禮務鎭風俗不使迷於方向而最深於易算大而天地山川小而至草木昆虫之理靡不推究恬於自有獨樂之趣未嘗易語人或有願學者答曰本源上工夫至而遽學此則反爲心術之害且明於數不若明於里欲要明里先須致精於日用肯綮之間而涵養本源乃爲上達千理也詩人咸稱爲後堯夫家庭乃閨門之內有如朝廷規模肅嚴事伯仲如嚴父每事必先問而有疾若痛己左右扶持衣食之物隨時供奉必先於躬其於諸姪諸從孫亦先於己出辦其資裝及時婚娶凡有經理必先宗而後私優給祭田以贍先祀敎子有義方類書前哲之善行使在常目敦宗族有友道周施貧乏無遠近之別至於婢僕先恩而後威或有過失不輕施呵責也晩歲扁其堂曰湖軒自擬范蠡五湖之志而日與道友論經自娛樽酒相屬不愛千金待以擧火者爲數十家 哲宗辛亥五月十五日有疾將終有遺敎曰淸愼守分畏法奉公八字而乃 然而逝享年五十有五遠近聞者皆嘆曰哲人 矣匍臨喪如悲親戚葬于谷城石谷坊高壯山子坐之原壬戌冬因道臣啓 贈朝奉大夫童蒙敎官 高宗甲子加贈通政大夫承政左承旨兼經筵參贊官戊辰秋又命旌閭配全義李氏士人友進之女慈惠好施仁聲滿鄕有四男三女長男相義出后仲父賢溥生炳希次相衡生炳植次相良生炳琳次相赫生炳燦女嫡任寬壽張聖烈李鍾徹盖公天姿英邁骨格俊秀儀形甚偉言辭莊厲望之儼然有德器至孝根天敦睦成家篤信好學涵養本源歛却英爽措諸繩墨介不絶俗行不踰閒屛世樂道恤窮愛人其嘉言懿行實不可泯沒無傳而其曾孫廷信來示其家狀要以爲文辭不獲己謹具以拙以待後日之君子 完山 李明翔 撰 文參判 승지공휘석부행장(承旨公諱碩溥行狀) 공의 휘는 석부(碩溥) 성(姓)은 조씨(趙氏) 자(字)는 과여(果汝) 호(號)는 호헌(湖軒)이다. 그의 세계(世系)는 옥천(玉川)으로 고려 문하시중(高麗門下侍中) 장(璋)이 그의 시조(始祖)이다. 벼슬을 계속 이어가더니 원길(元吉) 호(號) 농은(農隱)은 공양왕(恭讓王)때 一등훈(一等勳)으로 삼중대광 옥천군(三重大匡玉川君) 시(諡) 충헌(忠獻)을 받았으며 아들 유(瑜)는 고려말(高麗末) 전농부정(典農副正)이 되어 포은(圃隱) 목은(牧隱)과 사귐이 두터웠으며 아조(我朝)에서 누차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불렀지만 절개를 지키며 나가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호를 건곡(號虔)이라 부르며 지냈다. 그의 손자 지강(智崗)은 충무위(忠武衛)며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었는데 백중(伯仲)형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겸천(謙川)가에다 정자를 지어 상호(相好)란 이름을 걸어두고 서로 우애(友愛)하여 세상의 칭송한 바가 되었다. 아들 침(琛)은 대사성(大司成)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었고 손자 충정(忠貞)은 세자 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説書)였으며 경학(經學)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공의 八세조(八世祖)이다. 공의 증조는 형벽(荊璧)인데 수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였으며 조(祖) 태겸(泰謙)은 증 좌승지(贈左承旨)였고 고(考) 일신(一臣)은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비(妣)는 전주이씨(全州李氏) 필창(弼昌)의 딸로 효령대군 보(孝寧大君補)의 후예(后裔)이다. 三남을 두었는데, 성부(聖溥) 현부(賢溥)공인데 정조정사(正祖丁巳:一七九七) 十一월 五일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데가 있어 六·七세 되면서부터는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도리를 알아 아침저녁으로 빠뜨리는 일이 없었으며 방에 앉을 때는 아래목엔 앉지 않으며 말하기를, 『어른이 앉는 곳이다』라고 하였고 항상 새로운 계절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어버이에게 먼저 드리고 병환이 나면 식음을 폐하고서 부모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혹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밤늦도록 자지않고 동구밖가지 나가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오곤 하였다. 스승을 찾아가 공부할 때 하루에 수백줄의 글을 읽어 책을 덮으면 거침없이 외우었다. 그러는 가운데 문리가 날로 숙달했으며 절기용공(切己用功)에 관한 곳엔 더욱 힘을 썼다. 공의 집에서 서당까지 十여리나 되었지만 공은 간알하여 돌아와 부모의 거처를 살폈고, 같이 글을 읽는 벗이 양식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면 자기것을 같이 나누어 먹도록하여 가지못하게 하였으며 길가는 사람이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직접 옷을 벗어 구원해 주곤 하여 고을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장성한 후에 백부(伯父) 참판공(參判公)에게 글을 배우며 시서(詩書)를 복습하고 더욱 분발하여 반복 강논하는등 날로 공부가 진취되어 가자 참판공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뒷날 우리 집안을 이끌어갈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 일 것이라 하고 항상 근근(勤謹) 두 글자로 격려해 주었다. 갑술(甲戌)년 모복인의 병환이 위급해지자 시탕상분(侍湯嘗糞)도 하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도 빌어 보았지만 끝내 세상을 뜨고마니 얼굴을 대고 하늘에 사무치도록 울부짖으며 같이 죽기로 맹세하니 그의 어머니 가슴속에서 갑자기 대나무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모부인이 되살아나 공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내가 죽는 것은 명이지만 네가 죽는 것은 효도가 아니다.』 라고 하고 다시 숨을 거두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공의 정성이 지극하여 죽은 어미가 깨어나 경계한 것이다』 하였다. 가슴을 치며 피눈물을 울부짖는등 五·六일 동안 먹지 않다가 장사를 지낸 뒤 겨우 미음을 먹었으며 시묘(侍墓)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하여 병을 얻었으나 오히려 수질요질(首絰腰絰)을 벗지 않았으며 약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조석(朝夕)으로 곡묘(哭墓)하다가 하루는 묘아래 쓰러져 있는 것을 인근 노파가 알고 가서 구해주기도 하였다. 어머니를 여윈 뒤로 부친을 더욱 섬겨 몸소 나물캐고 고기잡아 봉양하였다. 그러던 계미(癸未)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모부인상 때와 같이 슬퍼하였다. 장사하는날 산주(山主)가 방해하며 칼을 휘둘러 위협까지 하다가 공의 측탄(惻嘆)한 기운이 겉으로 풍기는 것을 보고 이에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 크게 뉘우쳐 하는 말이, 『효자의 장사에 내가 차마 방해하지 못하겠다.』 하고 이에 동산소의 의(誼)를 맺었다. 또 평소 서모의 박대로 애매한 일이 많아 누차 험고(險苦)를 겪으면서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고 그의 뜻을 받드니 부친이 그 사실을 알고 서모를 내쫓으려 하자 공이 극구 간하여 근치게 하니 그뒤 서모가 감화되었다. 제사날이 되면 재계를 하고 평소에 즐겨하던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꿩고기를 마련하고 음식 만들 때도 몸소 주간하여 청결하게 하였으며 누군가가 육식과 비단옷을 주면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 젊어서부터 집이 가난하여 이런 것으로 부모를 봉양하지 못했노라.』 하면서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표갈수묘(表碣修墓), 치전수호(置田守護)하는 일에 평생 정력을 쏟았고 백부(伯父)가 세상을 뜬 뒤로 선인(先人)의 뜻을 기술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가업을 충분히 이어가지 못하는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여 더욱 학문을 힘을 쏟아 용학(庸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및 우리 동방 제유언행잡록(諸儒言行雜錄)등을 주야로 외우어 평생 성찰(省察)의 방법을 삼고 결단코 당시 사람들의 겉으로 꾸미기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순조 무자(純祖戊子)년에 과거를 보기위하여 상경(上京)하였다가 사학(邪學)이 온 장안에 유행하는 것을 보고 과거 볼 뜻을 버린 채 개연(慨然)히 분발(憤發)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선비의 기풍을 일으킬 뜻으로 남쪽지방 선비들과 집을 마련해 놓고 회강(會講)도 하고 음사례(飲射禮)와 같은 절차를 이행하여 풍속을 바로 잡고 백성의 나아갈 방향을 뚜렷하게 하였다. 공은 또 역법(易法)에 깊은 조예가 있어 크게는 천지산천과 작게는 초목 곤충의 이치를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이하여 혼자만 즐거움을 느끼면서 남에게는 쉽사리 말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 배우려 하면 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본원상(本源上)의 공부를 하지 않고서 이것을 배우려 하면 도리어 심술(心術)의 해가 된다. 또 수(數)를 밝게 하는 것보다는 이치를 밝게 알아야 하며, 이치를 밝게 알려하면 먼저 날마다 쓰는 긴요한 곳에다 정력을 쏟아 그 본원을 함양하여야 이에 천리(天理)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하니, 그 당시 사람들이 후세의 요부(堯夫)라 하였다. 공은 또 가정과 규문(閨門)에까지 또 조정의 규모같이 엄숙하게 하였고 백중(伯仲) 형을 어버이처럼 여겨 몸소 수발하며 의복이나 음식을 때에 따라 제공해 드리기를 자기보다 언제나 먼저 하였고 모든 조카나 종손(從孫)들까지도 자기 의식보다 먼저 하여 때가되면 혼인(婚姻)시켜 주는등 무릇 모든 일에 종사(宗事)를 먼저하고 사사(私事)를 다음으로 하여 많은 제전(祭田)을 마련 선영의 제사를 넉넉하게 하였고 자식은 옳은 도리로 가르켰으며 전철(前哲)의 착한 행실을 써서 벽에 붙여두고 항상 눈에 보이게 하였고 종족간에는 화목하였다. 빈궁한 사람을 도와주는데 있어서는 멀고 가까운 분별이 없었고 노복(婢僕)들에게는 위엄보다는 은혜를 먼저 베풀어 주고 설사 허물이 있다해도 가벼히 꾸짖지 않았다. 만년(晚年)에 집에다 호헌(湖軒)이란 현판을 걸어놓았는데 이는 범려(范蠡)의 五호(五湖)뜻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날로 덕망있는 벗들과 경서를 강론하며 술두루미를 끊이지 아니하는 등 재물을 아끼지 않으니 기다려 불사르는 자가 많았다. 철종 신해(哲宗辛亥) 五월 十五일 임종 당시 유언(遺言)으로 『청신수분 외법봉공(清愼守分畏法奉公)』 八자를 남기고 문득 세상을 뜨니 향년이 五十五세였다. 곳곳에서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은 탄식하며 『훌륭한 사람 떠났다.』 말하고 일손을 놓고 찾아가 조상하고 자기 친척인양 슬퍼하였다. 묘는 곡성(谷城) 석곡(石谷) 고장산(高壯山) 자원(子原)에 있으며 임술(壬戌)년 겨울 도(道)에서 글들 올렸던 관계로 증직으로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이 되었고 고종 갑자(高宗甲子)에 추가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을 증직받고 또 무진(戊辰)년 가을 정려(旌閭)를 받았다.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우진(友進)의 딸로 자혜(慈惠)롭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여 그의 좋은 평이 고을에 가득했다. 四남 三녀를 두었는데 장남 상의(相義)는 중부(仲父)의 양자가 되여 병희(炳希)를 낳고 상형(相衡)은 병식(炳植)을 낳고 상량(相良)은 병림(炳琳)을 낳고 상혁(相赫)은 병찬(炳燦)을 낳았으며, 딸은 임관수(任寬壽), 장성렬(張聖烈), 이종철(李鍾徹)에게 출가했다. 공은 천품이 영매(英邁)하고 골격이 준수(俊秀)하며 거동이 위연(偉然)하고 말씨가 웅장하여 바라보면 엄연하여 덕망이 있어 보였다. 공의 효도는 하늘에 뿌리를 두었고 화목으로 집을 이루었으며 배움을 좋아하고 본원(本源)을 함양(涵養)하며 영상(英爽)을 물리치고 승묵(繩墨)을 놓은 채 그의 지개는 세속을 외면하지 않았고 행동도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았으며 도를 즐겨하며 곤궁한 사람을 구원해 주고 남을 사랑하였으니 그 가언의행(嘉言懿行)을 세상에 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공의 증손 정신(廷信)이 가장(家狀)을 들고와 나에게 보이며 글을 청한다. 사양하다가 할 수 없어 삼가 이 졸렬한 글을 적어 뒷날의 군자(君子)를 기다린다. 완산(完山) 이명상(李明翔)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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